9월 7일, 두 번째 ‘화장품의 날’을 맞았다.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화장품의 날이다. 대한민국 화장품 산업의 성취를 되돌아보고 산업 발전에 기여한 기업과 기업인, 현장의 종사자와 연구자들의 노고를 격려하며 앞으로의 도약을 다짐하기 위해 만든 날이다.
특히 지금 대한민국 화장품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써 내려가고 있는 기록을 생각한다면 ‘화장품의 날’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K-화장품·뷰티라는 이름은 이제 세계 화장품 시장에서 하나의 확고한 산업 브랜드가 됐다. 기업들은 미국과 일본·유럽·동남아시아·중동·중남미 등 세계 곳곳으로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브랜드 기업뿐만 아니라 △ ODM·OEM △ 원료·소재 △ 부자재·패키징 △ 유통과 물류에 이르는 산업 생태계 전체가 오늘의 K-화장품·뷰티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이날만큼은 그들이 주인공이어야 했다. 하지만 올해 두 번째 화장품의 날 기념식에서 정작 찾기 어려웠던 것은 ‘화장품의 주인공들’이었다.
누구를 위한 자리였나.
올해 기념식은 식품의약품안전처 주관으로 진행했다.
행사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묘한 장면이 펼쳐졌다. 식약처가 초청한 VIP와 수상자들의 좌석은 테이블별로 정해져 있었고 명패까지 놓여 있었다. 게다가 소위 VIP라는 간판 아래 안내 도우미들이 곁에서 안내를 도왔으니 이들이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를 놓고 혼란이 생길 여지는 없었다.
반면 일반 초청·참석자와 취재진, 수상자를 축하하기 위해 행사장을 찾은 사람들은 달랐다.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제대로 된 안내가 없었다. 행사장 입장 때부터 참석자들은 빈자리를 찾아야 했고 서로 눈치를 살피는 상황이 벌어졌다.
최초 등록·안내 데스크에서 참석자들의 명찰을 배포하면서 '일반 참석자들의 경우에는 별도의 좌석 배정을 하지 않았으니 편한 자리에 앉으면 된다'라는 안내 코멘트 한 마디였으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으리라.
물론 수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행사에서 좌석 안내가 완벽할 수는 없다. 현장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운영상의 문제라고 넘길 수도 있다.
문제는 이후였다. 공식 기념식이 끝난 뒤 점심식사가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식약처장을 포함해 식약처가 초청한 일부 VIP 인사들은 행사장을 빠져나가 별도로 마련한 장소에서 식사를 한 것으로 확인했다.
행사장에는 수상자와 업계 관계자, 일반 참석자들이 남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VIP들이 떠난 뒤 명패가 놓여 있던 테이블에 앉은 일반 참석자들에게 호텔 측 직원이 “명패가 있는 자리에는 식사를 제공할 수 없으니 다른 자리로 옮겨 달라”는 취지의 안내를 한 것이다. 기자가 바로 그 현장에서 듣고 보았다.
당연히 마찰이 빚어졌다. 행사에 정식으로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를 축하하기 위해 왔든, 업계를 대표해 왔든, 취재를 위해 왔든 주최 측의 행사에 참석한 손님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미 자리를 떠난 VIP의 명패가 놓여 있다는 이유로 식사를 제공할 수 없으니 이동하라고 했다.
그 순간 일부 참석자가 느꼈을 감정은 단순한 불편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황당함을 넘어 모멸감, 심지어 수치심까지 느꼈다는 반응이 나온 이유다.
‘VIP’가 떠난 자리에도 남아 있던 의전
더 씁쓸한 것은 이 장면이 올해 화장품의 날 행사가 안고 있던 문제를 가장 상징성있게 보여줬다는 점이다.
“화장품의 날인데 화장품 업계 사람들은 마치 불려나온 의붓자식 같았다.” 행사장에서 들린 한 참석자의 말이다. 표현은 거칠지만 이날 행사에 대한 업계의 불편한 감정을 압축한 한 문장이다.
화장품의 날의 주인은 누구인가. 식약처장인가. 식약처가 초청한 이른바 VIP들인가. 아니면 대한민국 화장품 산업을 실제로 일구고 세계 시장에서 뛰고 있는 기업과 기업인, 종사자, 연구자들인가.
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식약처는 대한민국 화장품 산업의 안전과 제도를 책임지는 정부 부처이며 산업 발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책 파트너다. 화장품의 날 기념식을 주관하는 것 역시 그 역할의 하나다.
그러나 ‘주관하는 사람’과 ‘주인공’은 다르다. 정부가 행사를 주관한다고 해서 정부가 행사의 주인공은 아니다.
화장품의 날이라면 화장품 산업이 주인공이어야 한다. 수출 현장에서 세계 시장을 개척한 기업인, 제품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실험을 반복한 연구자, 생산라인을 지키는 현장 종사자,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 세계 소비자를 만나는 창업자와 마케터, 원료·용기·패키징·유통·물류를 담당하는 산업 구성원들이 전면에 서야 한다.
정부 관계자와 VIP는 이들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올해 화장품의 날에서는 그 관계가 뒤집혀 보였다. 아니 뒤집혔다.
의전과 좌석, 안내와 동선은 식약처장과 초청 VIP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짜여 있었지만 정작 산업 현장에서 온 사람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는 찾기 어려웠다.
VIP들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들의 ‘명패’가 일반 참석자보다 우선하는 웃지 못할 상황은 그래서 더욱 상징성이 짙다.
사람은 떠났지만 의전은 남았다. 그리고 그 의전 앞에서 화장품 산업의 구성원들이 자리를 옮겨야 했다.
첫해와 달라진 행사, 무엇이 달라졌나
지난해 첫 화장품의 날 기념식과 올해 행사의 운영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기자의 취재에 의하면 첫 기념식에서는 대한화장품협회가 식약처와 협의하면서 행사 전반을 관장했고 협회 예산도 편성, 집행했다.
올해는 달랐다. 대한화장품협회와 식약처가 사전 협의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식약처가 예산을 투입하고 초청 인사 선정 등을 포함한 행사 전반을 주관했다.
협회는 일부 예산을 투입하는 한편 화장품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기업 프로모션 협조 요청, 서울시청 잔디마당 홍보부스 참여 요청과 운영, 기념식장 앞 기업홍보관 설치·운영, 표창 수상자 후보군 추천 등의 역할을 맡았다.
행사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이동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정부가 예산을 투입하고 행사를 책임 있게 주관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오히려 법정기념일로서 위상을 높이고 보다 안정적인 행사를 만들어가는 데 정부의 역할은 필요하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더 많이 관여한 결과, 화장품의 날은 더 ‘화장품 산업다운 행사’가 됐는가.
올해 행사장에서 벌어진 일만 놓고 보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화장품의 날에는 ‘화장품 사람’이 보여야 한다
기념일은 이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무엇을 기념하고 누구를 기억하며 누구에게 박수를 보내느냐가 그 기념일의 정체성을 만든다.
화장품의 날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화장품 산업은 정부가 만들어준 산업이 아니다.
기업들이 투자했고 연구자들이 기술을 개발했다. 생산 현장의 수많은 사람이 품질을 지켰고, 브랜드들은 세계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시장을 누비고 소비자를 만났다. 수많은 중소·인디 브랜드가 해외시장에 뛰어들었고 제조기업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생산 경쟁력을 쌓았다. 그 결과 대한민국 화장품은 세계 시장에서 지금의 위상을 얻었다.
그 성취를 기념하는 날이 화장품의 날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날의 가장 좋은 자리는 산업의 주역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가장 큰 박수 역시 그들이 받아야 한다. 정부와 유관기관 관계자는 이들을 격려하고 축하하며 앞으로 무엇을 더 지원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귀담아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해야 당연하다.
그것이 화장품의 날이라는 법정기념일의 존재 이유다. 그런데 행사장에서 산업 구성원들이 “우리는 들러리 같다”고 느꼈다면 그 행사는 결코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
더욱이 수출 전선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기업과 기업인, 화장품 산업 발전을 위해 연구해온 과학자와 연구자, 현장의 종사자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식약처장과 식약처가 초청한 VIP들이 행사의 중심처럼 이뤄졌다면 행사의 설계 자체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명패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화장품의 날을 기대하며
식약처와 대한화장품협회는 이번 행사 이후 별도의 리뷰 자리를 마련해 의견을 수렴하고 향후 행사에 반영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연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좌석 안내를 강화하겠다”, “식사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 “현장 스태프 교육을 보완하겠다”는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번에 드러난 문제는 좌석 배치나 식사 제공이라는 행사 운영 매뉴얼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장품의 날을 누구의 날로 볼 것인가라는 철학의 문제다.
내년 세 번째 화장품의 날을 준비할 때는 초청 VIP 명단을 작성하기 전에 먼저 물었으면 한다.
올해 대한민국 화장품 산업을 빛낸 기업은 어디인가. 세계 시장을 새롭게 개척한 사람은 누구인가. 기술 혁신을 이뤄낸 연구자는 누구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K-뷰티를 떠받친 현장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화장품의 날은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
그 질문에서부터 행사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식약처장은 화장품의 날의 주인공이 아니다. 식약처가 선정한 VIP 역시 주인공이 아니다.
화장품의 날의 주인공은 화장품이다.
정확히 말하면 화장품을 만들고, 연구하고, 판매하고, 수출하고, 세계 시장을 개척해온 ‘화장품 사람들’이다.
두 번째 화장품의 날. 화려한 행사장에는 많은 명패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기자가, 그리고 화장품 산업계가 찾고 싶었던 것은 명패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화장품 산업을 오늘의 자리까지 끌어올린 기업과 기업인, 연구자와 현장 종사자들이었다.
그날 행사장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좌석도, 점심식사도 아니었다. ‘화장품의 날’에 정작 화장품의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20년을 넘게 화장품 산업 현장에서 취재를 해 온 기자의 이러한 질문과 의문에 대해 식약처의 반박이든, 변명이든, 해명이든 그 어떠한 형태든 이날 '화장품의 날' 행사 진행에 대한 답을 듣고 싶다.




































